티스토리 툴바

달력

052012  이전 다음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COMMONWEALTH』중 보장소득과 관련된 언급 (p.306~311)

“내진 보강 : 자본을 위한 개혁주의적 프로그램 Seismic Retrofit : A Reformist Program for Capital

(5.3절, PRE-SHOCKS ALONG THE FAULT LINES 가운데)

 

1.

위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부분에서 저자들은 자본을 위한 개혁주의적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그리고 보장소득은 이 개혁주의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등장한다. 도대체 왜 하트와 네그리가 혁명이 아닌 자본을 위한, 그것도 개혁주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연스런 궁금증은 잠시 제쳐두고 우선 그들의 논의를 따라가보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의 주제를 위해서 보장소득이 이 프로그램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짚어보도록 하자.

 

2.

저자들은 자본이 다른 것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데 이르렀다고 한다. 물론 케인즈와 같은 걸출한 경제 사상가가 이러한 자기-파괴로부터 자본을 구출하려 시도했지만, 오늘날 케인즈식의 처방은 “더 이상 약효가 있지도 않고 심지어 때때로는 이 질병을 키우기까지 하는”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개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전지구적 귀족정이 이러한 개혁을 수행해낼 수도 없으며, 설사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자본 너머 새로운 생산 양식”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위기는 그것의 객관적인 모습, 예컨데 신용위기, 인플레이션, 주택가격의 하락, 통화위기 등등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의 주관적인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것의 주관적인 모습이란 “생산적인 주체성들을 가로막고 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애물들이다”. 예컨데 공통적인 것에의 접속을 막는 것 등등. “가장 시급한 개혁은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계발과 협력적 사회적 네트워크의 창안을 위한 필요품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들이 생각하는 오늘날 위기라고 이야기되는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의 본령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현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생산 양식인 삶 정치적 생산에 자본 스스로가 장애가 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위한 개혁의 프로그램은 바로 이 삶정치적 생산의 차원에서 생산력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된다.

즉 “첫 번째 종류의 개혁들은 삶정치적 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기반구조(infrastructure)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기반구조로서 저자들은 먼저 깨끗한 물, 기본적 위생 시설, 전기, 음식 등등의 충분한 물리적 기반구조를 든다. 그러나 이러한 단지 살아있음만으로 삶정치적 생산을 이끌어낼 수 없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저자들은 “사회적이고 지적인 기반구조 또한 삶정치적 주체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요구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이 비물질적, 정동적, 언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인식이 뒷받침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적이고 지적인 기반구조로서 저자들은 교육을 예로 든다. 나아가 저자들은 이러한 교육의 귀결로서 “정보와 문화의 열린 기반구조가 다중의 생각하고 다른 이들과 협동하는 능력을 완전히 계발하고 실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렇게 열린 공통 기반구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금이 필요하다. 여하튼 기반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열린 기반구조 하에서는 이를 이용한 수익창출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이를 보충할 지원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기금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들은 이러한 “물리적, 사회적 그리고 비물질적 기반구조의 개혁에 더하여, 또 다른 종류의 개혁은 삶정치적 생산에 요구되는 자유를 제공해야만 한다”고 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개혁, 즉 자유를 위한 개혁을 주장한다. 저자들은 자유를 위한 개혁과 관련하여 자유를 공간의 차원과 시간의 차원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먼저 공간적 자유를 위한 개혁은 바로 이동의 자유(freedom of movement)가 된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유로이 국경을 가로지르고, 또 원하는 곳에 정착하여 살 수 있는 자유이다.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만남, 관계 맺음 등이 중요한 생산력의 원천이 되는데, 이동의 자유는 바로 이것을 늘려줌으로써 삶정치적 생산의 생산력을 증대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적 자유와 관련하여 요구되는 개혁이 바로 보장소득이다.

 

“자유의 두 번째 개혁은 시간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비자유시간의 가장 주요한 부분은 노동에 묶여있다. 사장의 명령을 포함하여, 삶정치적 노동의 자율성에 대한 모든 침해는 생산성에 대한 장애물이다.(사실상 삶정치적 시대에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가―콜 센터에서, 사무실 책상에서, 들판에서, 혹은 공장에서 일하기―를 측정하는 것이 착취의 하나의 좋은 척도가 된다.) 시간의 자유를 부여할 개혁은 노동여부와 상관없이 국가적 혹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모두에게 지불되는 최소의 보장 소득의 구축이다. 노동으로부터 소득을 분리시키는 것은 모두에게 시간에 대한 더욱 많은 지배를 줄 것이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저자들은 보장소득을 경제학적 정의 (부는 넓게 산포되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가로질러 생산되며 따라서 그것을 보상하는 임금은 사회적으로 동등해야 한다)와 사회적 복지 (현시대 우리의 경제에서 완전 고용에 가까운 어떤 것도 불가능하기에 소득은 일자리 없이 남겨진 이에게도 제공되어야 한다)에 기초하여 보장소득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모든 인구가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최소한을 가진다는 것이 자본의 이익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중에서 자율성과 시간에 대한 지배를 부여하는 것은 삶정치적 경제에서 생산성을 기르는 것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309-310)

 


















이러한 공간적 자유와 시간적 자유는, 그리고 이들을 위한 이동의 자유와 보장소득은 소통과 협력을 통한 다중의 생산적 역량의 발현을 위한 사전조건이 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실제적인 능력의 성장이라는 또 다른 계기가 추가되어야 한다. 즉 “삶정치적 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자유는 또한 사회적 관계들을 구축하고 자율적인 사회적 기구들을 창조할 힘을 포함”하며 저자들은 이러한 능력의 계발을 위해 “참여 민주주의의 메카니즘의 구축”을 제안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에서 다중들은 “사회적 협력과 자치를 배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저자들이 밝히는 “자본을 위한 개혁주의적 프로그램”의 내용이다. 이 프로그램은 분명 자본을 위한 것이지만, 이미 저자들이 말한 바와 같이, 이 프로그램이 자본에서 시작될 것이라 보장할 순 없다. 오히려 “개혁들은 오로지 투쟁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며, 이러한 투쟁들은 이미 진행중이다.

 

3.

이제 마지막으로 앞서 미루어두었던 질문에 대한 저자들의 답변을 들어보자. 왜 저자들은 다중의 혁명을 위한 책에서, 자본을 위한 개혁주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가? 저자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의혹으로 가득찬 눈초리로 자신들을 향해 이러한 질문을 던질 것을 예상하고 답변을 준비해놓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는 당연하다고 하는 만큼 오래된 혁명 혹은 이행에 대한 어떤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저 세상을 가리키는)혁명과 (단지 이 세상을 좀 더 살만할 것으로 바꿀)개혁은 분명히 구별되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관념. 저 세상은 이 세상이 말끔히 청소된 공터에서야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는 관념. 요컨데 자본의 세상과 노동의 세상은 엄격히 구별되며 적에게 해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득이 된다는 관념. 저자들은 이러한 관념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본을 위한 개혁주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일의 의미를 밝힌다. 이는 보장소득과 관련하여서, 보장소득을 주장하는 것이 오늘날의 혁명과 이행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독자들은 이 시점에서 우리의 혁명적 의도들을 의심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자본을 구할 개혁들을 제안하고 있는가? 그것은 혁명을 단지 연기시킬 뿐이지 않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행에 대한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의 것은 다음과 같은 붕괴 이론들과 다르다. 즉 “사태가 나빠질수록, 상황은 좋아진다 The worse things are, The better things are”와 같은 슬로건을 들고, 파국적 위기로부터 출현하는 자본주의적 지배의 종말을 그리고 있는 붕괴 이론과는 다르다. 그것은 또한 국가의 조절, 통제,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관리를 증가시키면서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부와 통제의 이전을 내다보는 사회주의적 이행 관념과도 다르다. 대신에 우리가 갖고 작업하고 있는 이행의 종류는 사적이고 공적인 통제 모두로부터 다중의 점증하는 자율성을 요구한다. 또한 협력, 의사소통 그리고 사화적 만남들을 조직화함에 있어서의 교육과 훈련을 통한 사회적 주체들의 변형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공통적인 것의 점진적인 축적을 요구한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자신의 무덤파는 일꾼을 창조하는 방식이다. 즉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존을 보존하려 하는 가운데 그것은 반드시 생산적 다중의 점증하는 힘과 자율성을 길러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힘들의 저 축적이 문지방을 넘을 때, 다중은 자율적으로 공통 부(common wealth)를 다스릴 능력을 갖춘 채 나타날 것이다.”(p310-11)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COMMONWEALTH』중 보장소득과 관련된 언급  (0) 2010/01/26
독서노트, <제국> 서문  (1) 2009/11/06
Posted by 치치파파

<한국철학사> 수업시간에 제출한 레포트이다. 제출시한에 쫓겨 제대론 된 책 한 권 못 읽어보고 쓴 것이라 부실하기 그지없지만, 간화선이나 활구참구에 대한 간단한 소개 삼아 포스팅한다. 글 가운데 <뜰 앞의 잣나무> <무자공안> <소옥아!> 등 간화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공안들이 사례로 들어가 있는데 -공안에 대한 분석보다도 이 공안 자체가- 나로서는 꽤 흥미있었던 부분이다. 참고삼아 읽어보시라.




 

간화선의 활구참구와 베르그송(H. Bergson)의 이미지-언어 

1. 서론

동양의 철학과 서양의 철학을 비교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작업이 주는 흥미로움은 마치 상이한 생물들 사이에서 상사기관을 발견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시‧공간적으로 유격된 두 문화권에서 비슷한 모습의 철학을 발견되는 것은 실로 거대한 우연처럼 보이기도 하기에 이러한 흥미로움을 더해준다.

그러나 상사기관이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면서도 비슷한 환경에 놓은 생물들 사이에서 진화론적 과정을 통해 발생되는 것처럼, 우리는 동양의 어떤 철학과 서양의 어떤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에 대해서도 단지 우연으로만 치부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 중요한 것은 이들의 유사성이 보여주는 공통된 지점, 즉 손가락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근래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동양 철학, 특히 선 불교와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비교 연구는 양자 사이의 계통적 친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양자 모두 역사적으로는 교학과 대륙철학이라고 하는, 개념 중심의 사유에 대해 반기들 들면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내용적으로도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看話禪)의 활구참구(活句參句)에서 나타나는 언어와 진리의 관계와 베르그송(H. Bergson)의 언어관 사이에도 또한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둘 다 모두 일종의 언어적 방법에 대하여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는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겉보기 모습상의 유사성을 낳는 것은 진리와 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양자가 어떤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진리관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진리의 성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진리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먼저 간략히 간화선의 활구참구를 살펴보겠는데, 특히 선 불교 특유의 불립문자의 관점에서 활구참구를 검토하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베르그송의 언어관을 간략히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양자의 유사성을 밝히고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저 하나의 달이 어떤 모습일지 간략히 그려보도록 하자.

 

 

2. 간화선의 활구참구

먼저 간화선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고찰해보자. 간화선은 공안문답(公案問答)으로부터 시작한다. 공안문답은 선 불교의 기원적 성격을 이루는 것으로서 중국적 색채가 매우 짙다. 즉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이래 중국의 삼현‧청담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본래 선사가 학인을 만나서 그 학인을 시험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문답이다. 학인의 선적 체험의 깊이를 밝혀보려는 목적에서 던지는 문답이므로 이것은 지식의 유무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혹은 넌센스에 가까운 문답으로 이루어진다. 요컨데 공안문답은 격외문답이다. 다음의 <뜰 앞 잣나무>는 대표적인 격외문답으로서 공안문답의 특징을 보여준다.

 

문 :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으로 온 뜻입니까?

답 : 뜰 앞 잣나무니라.

 

이 문답의 답변자는 조주선사이며, 물음 속의 조사는 달마대사를 일컫는다. 질문의 내용은 달마대사가 서쪽 즉 인도에서 온 이유를 묻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이 질문은 실상 달마의 깊은 뜻에 대한 궁금함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주선사가 답하는 것은 ‘뜰 앞 잣나무’이다. 여기서 잣나무는 문답이 오가는 상황에 마침 있었던 나무일 뿐이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요컨데 잣나무는 달마대사의 깊은 뜻에 대해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는다. 격외문답으로서 공안문답은 이렇게 사실은 문-답이 아니며,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어떤 문답이다.

간화선은 이러한 공안문답을 형식하여 공안의 화(話)두를 바라보는(看) 것이다. 간화선의 시조는 중국 송 대의 대혜(大慧)종고이다. 간화선은 공안문답의 화두를 하나의 참구대상으로 하여 이 화두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인 것이다. 이러한 간화선은 당시의 시대적 분외기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즉 당시의 사대부들이 선의 중심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직관적 체험을 도외시하며, 선사들의 언구를 지적 분석으로 알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타개법으로 대혜는 간화선을 제창한 것이다.

한국 간화선의 시조인 보조 지눌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적극적 반성 속에서 대혜의 간화선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즉 보조는 『화엄경』등 대승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법을 이해하고 신행을 돈독하게 하기 위해 제시한 『원돈신해문』등의 가르침은 사실 사량 분별과 성식으로 불법의 정신과 사상을 이해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간화경절문』에서 조주의 ‘무자’를 참구하는 것을 통해 돌아가지 않고 곧장(徑截) 깨달음을 얻는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보조는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라는 대립적 개념쌍을 통해 간화선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즉 <말 가운데 말이 있으면 사구이고, 말 가운데 말이 없으면 활구이다>라고 하여 활구의 참구 만이 참선자가 지식의 알음알이(知解)에 빠지지 않고 공부해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 다음의 무자(無字) 화두는 활구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문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답 : 無.

 

여기서 무는 앞선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이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즉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부처는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지식의 병폐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다. 여기서 ‘무’는 단지 소리일 뿐이다. 이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도록 그리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다음의 시는 소리로서 답안이 갖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저 큰 저 댁의 우아한 풍경,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어라!

지금 저 깊숙한 여인의 방에서 사랑에 괴로워하는 여인이 있네

그녀는 자주 소옥아! 소옥아! 라고 시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원래 그에게 시킬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녀의 속셈은 소옥아! 라고 부르는 자기의 목소리를 빌어 밖에 있는 낭군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소옥아!’라는 외침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암호’로써 자신의 하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외침은 하녀를 통과해나가야 하고 저 밖에 있는 자신의 낭군에 닿아야 한다. 그리고 ‘무자’공안의 ‘무’ 역시 이런 과정에 있다.

이상에서 간화선의 활구참구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특징을 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선의 ‘불립문자’의 배경과 의미를 알 수 있다. 불교가 학문으로서 연구되면서 불교에 대한 지적 접근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방편으로서의 공부가 실천으로서의 선을 압도하는 주객전도적인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불립문자’는 방편이 실천 보다 중요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아가 공안문자의 성립과 간화선으로의 발전에서 우리는 단순히 교학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진리와 문자, 진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란 항상 고정된 의미를 지닌 것이며, 어떠한 가르침도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고정된 의미 속에 묶여버린 ―말 가운데 말이 있는― 죽은 언어(死句)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가르침에 대한 태도에 있다. 언어로 표현되는 가르침은 이미 지적한 바대로 고정된 의미에 묶이는 한에서, 이 가르침은 선사의 뜻에 대한 추리가 되고야 만다. 그러나 간화선에서 활구를 참구하되, 간(看)의 방식으로 한다는 것은, 선사가 뱉은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심하고 자신의 계기(화두)로 삼아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고자 함에 그 중요성이 있다. 넌센스로 보이는 공안문답은 바로 이런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데 간화선에서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자발성의 강조를 볼 수 있다.

 

 

3. 베르그송의 언어론

베르그송에 따르면 언어는 본래 삶의 유용함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협동이 필수적이다. 언어는 바로 이 협동의 과정 속에서 탄생한다. 즉 인간이 사물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 사물이 어떤 것이라는 규정과 이 사물을 어떻게 변형시켜야 한다는 지시가 필수적인데,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이러한 작업을 행한다. 규정과 지시는 또한 인간 행위의 협동의 과정에서 소통과 명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소통과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언어는 부동성에 기초해야 한다. 안정적인 근거에 기반할 때에만 소통과 명령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낱말에 대해 저 마다의 이해방식을 갖고 있다면 소통과 명령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따라서 언어에 기초한 새로운 것의 파악은 항상 지금 출현하고 있는 새로움을 기지(旣知)의 요소로 분해, 대체하는 작업이라는 것이 베르그송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즉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언어를 통한 파악의 방법인 ‘분석’ 대신 새로운 것의 파악에 있어서는 그것의 내부에 자리잡아 그것을 바라보는 ‘직관’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직관’의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새로운 것을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직관’을 통해 절대적 인식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표현은 역시 다시 언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언어의 추상적 성격을 비판하면서도, 언어를 통한 표현의 가능성을 인정하기 위해 언어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즉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인 규정과 지시, 요컨대 개념화 대신 대상의 이미지화를 통해서 대상에 대한 직관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개념은 항상 기지적인 것이기에 대상 보다 항상 “크게 재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에 대해 하나의 개념으로 그것을 속성을 지시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개념은 그것이 개념인 한에서 다른 대상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이미지는 그 대상에 한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다른 대상에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개념을 통해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는 대상에 대한 어떤 주의도 사실상 기울이지 않는 셈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기지의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가 대상에 대해 기울이는 것은 이 대상이 기지의 어떤 것과 얼마나 닮아있냐하는 유사성에 대한 관심이지 대상 자체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개념을 분석함으로서 대상을 파악할 때 사실상 적은 노력만을, 아니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반면 이미지는 대상에 대해 주의를 요구한다. 즉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은 항상 새로운 것이며 그것을 닮은 이미지 또한 새로운 것이기에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미지에 집중하고 주의하면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아가 베르그송은 대상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하나의 이미지만을 취해 대상을 그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은 개념으로 대상을 대체하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그리고 서로 다른 이미지를 취할 것은 요구하는 베르그송의 주장은 이미지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 그 대상 자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여기서 대상에 대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에 불과한 것 같다.

따라서 베르그송의 언어론은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직관을 강조하는 그의 인식론과 맞닿아있다. 개념으로서의 언어는 항상 사물을 기지의 요소로 대체하여 “사물의 주위를 맴돌 뿐이며” 대상 그 자체로의 진입을 방해한다. 이미지는 물론 그 자체로 사물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긴장을 유발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물 그 자체의 내부에서 그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4. 결론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간화선의 활구참구와 베르그송의 언어에 대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양자 모두 진리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조주의 ‘무자공안’에서 ‘무’는 개에게 불성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즉 ‘무’를 의미론적으로 파악하여 어떤 뜻을 지닌 낱말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를 의미론적으로 파악했을 때 질문은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없는가’라는 식으로 단순해진다. 그러나 개의 불성에 대한 확인은 부처의 말이나 선사의 말에서 추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부처가 이렇게 말했고 개는 이러이러하므로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베르그송식으로 말하자면 적절한 탐구는 오직 불성에 대한 직관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양자 사이에 더욱 심오한 유사성, 유사성이 가리키는 어떤 동일한 직관이 있는 듯하다. 불교의 수행에서 중심이 되는 깨달음은 어떤 낱말의 의미로 즉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 말하자면 진리는 항상 처음에는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은 오로지 그것 자체에 머물러 그것을 바라보고자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나아가 ‘무’가 ‘소옥아!’라는 외침과 같이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간화선의 화두는 베르그송의 이미지와 닮아있다. ‘무’는 진리의 담지체이기 보다 진리를 호출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이미지 역시 대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우리의 긴장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우리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긴장을 환기시켜주는 것으로서 언어라는 인식은 대상에 대한 탐구에서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로 베르그송의 말처럼 “개념에 의한 파악을 우리에게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항상 새로운 것으로 나타나기에 우리는 그것에 접근할 때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자발성이 요구된다. 격외문답으로서 공안문답에는 어떠한 해석의 가능성도 막혀있다.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까닭이 ‘뜰 앞의 잣나무’ 라니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바로 여기에서 즉 해석의 가능성이 막혀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이제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이유가 궁금한 질문자는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삼아 궁리해야 한다. 공안문답과 간화선에서는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궁리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유일한 탐구법임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베르그송이 강조하는 “도시의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서의 철학” 또한 이러한 탐구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참고문헌

<선과 자크 데리다:새로운 격의불교의 모색>, 이만식, 『동서비교문학저널』16호, 2007

<한국의 간화선 연구:보조를 중심으로>, 서상인, 『석림』21호,1987

「보조지눌의 간화선 연구」, 성본, 『보조사상』17호, 2002

H. Bergson, 『사유와 운동자La pensée et le mouvant』; 한글본 『사유와 운동』, 이광래 옮김, 문예출판사, 1993년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화선의 활구참구와 베르그송의 이미지-언어  (0) 2009/12/21
Posted by 치치파파
배우는 것도 없이
무너지는 날이 있더라.
Posted by 치치파파